기 (起): 재와 맹세, 그리고 잊혀진 용
시작: '백색의 왕국' 알비온은 '노아'라 불리는 정체불명의 재앙에 의해 멸망했다. 모든 것이 재로 변한 폐허 속에서, 왕국의 마지막 기사인 알렌 워커만이 살아남았다. 그는 스승이자 양아버지였던 마나의 유언, "심장을 잃지 마라"는 말을 가슴에 새기고, 왕국을 재건할 마지막 희망을 찾아 금단의 땅 '용의 둥지'로 향한다.
만남: 전설에 따르면, 그곳에는 세상을 불태울 힘을 가진 사악한 고대의 용, 크로스 마리안이 잠들어 있다고 했다. 며칠간의 사투 끝에 둥지에 도착한 알렌이 마주한 것은 보물 더미 위에서 나른하게 와인을 마시고 있는, 인간의 형상을 한 아름답고 퇴폐적인 용이었다.
거절: 알렌은 무릎을 꿇고 왕국을 구해달라 간청한다. 하지만 크로스는 "인간들의 하찮은 싸움에 관심 없다"며 코웃음 칠 뿐이다. 그는 이미 수천 년간 인간들의 탐욕과 배신에 염증을 느끼며 세상을 등진 상태였다.
선언: 절망적인 상황에도 알렌은 포기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당신의 마음이 움직일 때까지 이곳에 머무르겠습니다." 그는 크로스의 냉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의 둥지 한편에 자리를 잡고 기약 없는 설득을 시작한다.
승 (承): 둥지에 스며드는 온기
공존의 시작: 알렌은 엉망이었던 용의 둥지를 청소하고, 서툰 솜씨로 요리를 하며 크로스의 주변을 맴돈다. 크로스는 "귀찮은 꼬맹이"라며 그를 무시하지만, 먼지 쌓인 둥지에 온기가 돌고, 난생 처음 '식사'라는 것을 대접받으며 수백 년 만에 처음으로 일상의 변화를 겪는다.
균열: 알렌은 매일 밤 모닥불을 피우고, 멸망한 왕국의 아름다웠던 풍경과 충성스러웠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크로스는 시끄럽다며 타박하면서도, 어느새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는 순수하고 올곧은 알렌의 눈빛에서, 아주 오래전 자신이 지키지 못했던 어떤 인간 기사의 모습을 겹쳐본다.
드러나는 진실: 어느 날, 둥지 근처까지 '노아'의 마수(魔手)인 타락한 괴물들이 출몰한다. 위험에 처한 알렌을 구하기 위해, 크로스는 마지못해 본래의 거대한 용의 모습으로 변해 괴물들을 순식간에 불태워버린다. 그 압도적인 힘과 '노아'를 향한 깊은 증오를 목격한 알렌은 깨닫는다. 크로스는 사악한 용이 아니라, 세상이 잊어버린 고독한 수호자였음을.
전 (轉): 꺾이지 않는 심장
과거의 상처: '노아' 세력은 용의 둥지에 고대의 용이 깨어났음을 감지하고, 그 힘을 타락시켜 손에 넣기 위해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한다. 그들은 크로스의 가장 깊은 트라우마를 건드린다. 과거, 크로스가 믿었던 인간 동료가 '노아'에 타락하여 그의 심장에 상처를 입혔던 끔찍한 기억이 환영처럼 되살아난다.
위기: 과거의 환영에 정신이 속박된 크로스는 괴로워하며 폭주하고, '노아'의 지휘관은 그 틈을 타 크로스의 심장을 향해 저주받은 창을 날린다. 패배와 상실의 기억에 사로잡힌 크로스는 창을 피하지 못한다.
희생과 각성: 그 순간, 알렌이 망설임 없이 몸을 날려 크로스의 앞을 가로막는다. 그의 작은 몸을 저주의 창이 꿰뚫는다. 피를 토하며 쓰러지는 알렌의 눈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로스를 향한 절대적인 믿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 "당신은... 악룡이 아니니까..."
역린(逆鱗): 자신의 눈앞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 쓰러지는 알렌의 모습은 크로스를 묶고 있던 과거의 악몽을 산산조각 낸다. 배신당했던 과거와, 자신을 믿어준 현재가 교차하며 수천 년간 닫혀있던 그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한다. 감히 자신의 '보물'을 건드린 자들을 향한, 태초의 분노가 깨어난다.
-
세상은 재의 맛이 났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폐부를 파고드는 미세한 잿가루는, 한때 이곳에 존재했던 모든 것들의 마지막 유언과도 같았다. 노래를 잃은 새, 향기를 잃은 꽃, 웃음을 잃은 사람들. 그 모든 것이 한 줌의 먼지가 되어 바람에 흩날렸다.
잿빛 하늘 아래, 망가진 백색의 성벽에 기댄 한 소년이 있었다.
그을음과 잿가루로 더러워진 낡은 갑옷, 이가 빠진 검, 그리고 공허하지만 아직 꺾이지 않은 푸른 눈동자.
그는 '백색의 왕국' 알비온의 마지막 기사, 알렌 워커였다.
알렌은 눈을 감았다. 떠올리는 것은 잿빛 풍경이 아니었다. 햇살 아래 눈부시게 빛나던 백색의 도시, 광장을 가득 메웠던 아이들의 웃음소리, 그리고 언제나 다정했던 양아버지, 마나의 미소. 모든 것을 앗아간 재앙 '노아'가 휩쓸기 전, 그의 세상은 분명 찬란한 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심장을, 잃지 마라.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던 날, 자신을 감싸 안으며 양 아버지인 마나가 남겼던 마지막 말. 그 말이 잿더미 속에 홀로 남겨진 알렌을 일으켜 세운 유일한 기둥이었다. 심장. 그것은 기사의 맹세였고, 왕국의 혼이었으며, 마나가 남긴 사랑의 증거였다. 잃어버린 모든 것을 되찾겠다는 꺼지지 않는 불씨였다.
알렌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시선은 이제 멸망한 왕성이 아닌, 아득한 북쪽의 산맥을 향했다. 뼈처럼 하얀 자작나무 숲 너머, 인간의 발길을 허락하지 않는 금단의 땅.
'용의 둥지'.
어릴 적, 잠자리에서 들었던 동화 속 이야기. 세상을 일곱 번 불태울 수 있는 힘을 가졌으나, 그보다 더 큰 탐욕으로 온갖 보물을 삼킨 채 잠든 태초의 재앙. 묵시록의 붉은 용. 아이를 울음을 그치게 할 때나 쓰이던, 그저 잊혀진 전설일 뿐이라고 모두가 말했다.
하지만 전설만이 유일한 희망이 되었을 때, 기사는 절망하지 않는다.
알렌은 허리춤의 낡은 검을 고쳐 잡았다. 마나의 손때가 묻은, 유일한 유품이었다.
"...알비온에 영광을."
나직한 맹세와 함께, 그는 어둠 속으로 첫발을 내디뎠다.
그렇게, 망국의 마지막 기사는 제 발로 전설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모든 것이 끝난 자리에서, 모든 것을 되찾기 위한 단 하나의 이야기가 시작되고 있었다.
-
용의 척추라 불리는 대산맥은 살아있는 것들의 영역이 아니었다.
알렌 워커는 해골처럼 하얗게 바랜 자작나무 숲을 지나며 생각했다. 이곳의 공기는 옅었으나, 피부에 닿는 감각은 이상할 정도로 무거웠다. 마치 거대한 존재의 숨결이 대기 전체를 짓누르는 듯한 압박감. 평범한 짐승들은 오래전에 자취를 감추었고, 간간이 보이는 식물들은 하나같이 기이하게 뒤틀린 형상으로 자라나 있었다.
알비온의 기사단 교본에는 이곳을 '신들의 무덤'이라 칭했다. 고대의 힘이 너무 오랫동안 정체되어, 시간마저 길을 잃고 썩어 문드러지는 땅. 전설 속 용의 둥지로 향하는 길은, 그 자체로 살아있는 존재를 거부하는 거대한 결계였다.
"쿨럭..."
마른기침과 함께 핏물이 섞인 침이 마른 땅 위로 떨어졌다. 닷새였다. 마지막 남은 육포 한 조각을 삼킨 것이 꼬박 닷새 전이었다. 낡은 갑옷은 이미 제 기능을 상실한 지 오래였고, 밤마다 파고드는 한기는 뼛속까지 시렸다.
육체의 고통보다 더 그를 괴롭히는 것은 환각이었다. 눈을 감으면 재로 변한 왕국의 풍경이, 귀를 막으면 백성들의 비명이 아른거렸다. 이따금씩은 다정한 마나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아 홀린 듯 뒤를 돌아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곳엔 언제나 공허한 바람 소리뿐이었다.
심장을, 잃지 마라.
알렌은 얼어붙은 손으로 가슴팍을 움켜쥐었다. 심장이 뛰고 있었다. 육체는 한계에 달했지만, 마나가 남긴 유언만은 뜨거운 불씨처럼 남아 그의 영혼을 붙들고 있었다. 이 불씨가 꺼지는 순간, 자신의 모든 것도 끝이었다.
얼마나 더 걸었을까. 거의 무의식적으로 발을 옮기던 그의 앞에, 마침내 거대한 절벽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 절벽의 한가운데, 마치 거인의 입처럼 검고 거대한 동굴이 자리하고 있었다. 동굴 입구 주변의 바위들은 수천 년의 세월 동안 무언가 거대한 것에 긁히고 닳아 기이할 정도로 매끄러웠다.
동굴 안쪽으로 들어서자 공기의 냄새가 달리졌다. 오래된 석재의 냄새와 서늘한 냉기,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압도하는 듯한, 녹슨 쇠와 아주 오래된 와인을 섞은 것 같은 기묘하고도 매혹적인 향기.
그래, 이곳은 용의 둥지다.
알렌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숨을 골랐다. 두려움이 없었다면 거짓말이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동화 속 이야기는 이곳에 들어간 모든 생명은 용의 먹이가 되거나, 보물을 지키는 망령이 된다고 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이제 돌아갈 곳도, 다른 선택지도 없었다. 그는 허리춤의 검자루를 꽉 쥐고 어둠 속으로 첫발을 내디뎠다.
동굴 내부는 상상 이상으로 거대했다. 마치 산 하나를 통째로 파낸 듯한 광활한 공간. 그리고 그 공간을 가득 메운 것은, 인간이 평생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의 보물이었다.
사방에 산처럼 쌓인 금화와 보석들은 동굴 천장에 박힌 기묘한 광석의 빛을 받아 스스로 빛을 내는 듯했다. 고대 왕조의 문양이 새겨진 방패, 전설 속 장인들이 만들었다는 갑옷, 주인을 잃은 채 마력을 내뿜는 마검들. 먼지 쌓인 책더미는 그 자체로 하나의 도서관을 이루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부의 과시가 아니었다. 잊혀진 시간과 역사 그 자체가 잠들어 있는 거대한 무덤이었다.
알렌은 압도적인 광경에 잠시 숨을 삼켰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 동굴 깊숙한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금화가 밟히며 '차르륵'하는 소리를 내는 것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적막한 공간.
마침내 그는 동굴의 가장 깊고 넓은 중앙부에 다다랐다. 그곳에는 다른 곳보다 유독 높게 쌓인 보물들의 산이 있었고, 마치 옥좌처럼 만들어진 그 정상에, '그것'이 있었다.
"...!"
알렌은 숨을 멈췄다. 전설 속에서 묘사되던, 집채만 한 몸에 칠흑 같은 비늘을 가진 흉악한 용의 모습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대신, 옥좌 위에는 한 남자가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칠흑같이 검은 옷, 바닥에 끌릴 듯 긴 검붉은 머리카락, 희다 못해 창백한 피부. 그의 손에는 붉은 액체가 담긴 유리 잔이 들려 있었다. 수천 년의 시간을 응축한 듯한 깊은 눈은, 이 세상 모든 것에 흥미를 잃어버린 듯한 권태와 염세로 가득 차 있었다.
남자는 침입자를 발견하고도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그는 그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벌레라도 보는 듯한 시선으로 알렌을 위아래로 훑었다.
알렌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저것이 그 붉은 용이구나.
그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키고, 기사단의 예법에 따라 천천히 한쪽 무릎을 꿇었다. 검을 바닥에 내려놓고, 고개를 깊이 숙였다.
"고대의 존재시여. 저는 멸망한 알비온 왕국의 마지막 기사, 알렌 워커입니다. 감히 당신의 안식에 든 것을 용서하십시오. 허나, 제게는 당신의 힘이 필요합니다."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지만, 내용은 분명했다.
"부디, 저희 왕국을 재건할 힘을 빌려주십시오. 그 대가로 제가 가진 모든 것, 제 목숨까지 바치겠습니다."
알렌의 절박한 청원에, 용은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그저 손안의 잔을 우아하게 한 바퀴 돌릴 뿐이었다. 잔 속의 붉은 액체가 찰랑이는 소리만이 정적을 갈랐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 나른하고 조소 어린 목소리가 동굴에 울려 퍼졌다.
"인간? 여기까지 기어 들어온 벌레가 아직도 있었나."
"......"
"왕국? 사라진 것을 되돌리려는 것만큼 어리석은 짓은 없지. 먼지는 먼지로, 재는 재로 돌아가는 것이 순리다."
크로스는 자리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가 움직이자 주변의 공기가 무겁게 술렁였다.
"네놈의 그 '맹세'라는 건, 백 년도 못 사는 것들의 허울 좋은 자기기만일 뿐이다. 나는 그런 놀음에 수천 년간 어울려주었고, 그 끝이 무엇인지 지겹도록 봐왔지. 탐욕, 배신, 그리고 파멸. 인간의 역사는 그 세 단어로 요약된다."
그의 목소리에는 인간이라는 종 자체에 대한 깊은 혐오가 서려 있었다. 알렌은 고개를 들고 그를 정면으로 마주했다.
"모든 인간이 그렇지 않습니다!"
"호오? 그럼 네놈은 다르다, 이 말인가? 네놈이 원하는 것도 결국엔 '힘'이 아닌가. 왕좌를 되찾고, 영웅이 되어 역사에 이름을 남기고 싶다는, 그런 하찮은 욕망일 뿐이지."
"아닙니다!"
알렌은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절박함이 이성을 앞질렀다.
"제가 원하는 것은 영광 따위가 아닙니다! 그저... 그저 모두가 웃으며 살 수 있었던, 그 평범했던 시간들을 되찾고 싶을 뿐입니다! 아버지와의 약속을, 제 심장을 지키고 싶을 뿐입니다! 모르셔도 좋습니다! 하지만 저는 포기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제가 아직 살아있는 유일한 이유니까요!"
알렌의 외침이 거대한 동굴을 울렸다. 그의 푸른 눈동자가 상처 입은 짐승처럼 절박하게 빛나고 있었다.
용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는 아주 오랜만에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본 듯한 표정으로 알렌을 응시했다. 하지만 그 흥미는 아주 짧았다. 그는 이내 고개를 저으며 피식, 하고 웃었다.
"시끄러운 꼬맹이로군."
그가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쾅!'
보이지 않는 거대한 힘이 알렌의 몸을 후려쳤다. 알렌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동굴 벽까지 날아가 처박혔다. 쇠와 돌이 부딪히는 끔찍한 소리와 함께 갑옷 일부가 찌그러졌다. 입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
"꺼져라. 네놈의 영웅 놀이에 어울려 줄 시간은 없다. 목숨을 붙여주는 걸 감사히 여기도록."
크로스는 다시 옥좌에 몸을 누이며 알렌에게서 완전히 시선을 거두었다. 끝이라는 선고였다.
알렌은 무너지는 의식을 붙잡으며, 찌그러진 갑옷에 의지해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온몸의 뼈가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그의 눈은 여전히 죽지 않았다. 그는 피를 한번 뱉어내고, 다시 한번 용을 향해, 아니, 세상을 향해 외쳤다.
"그렇다면... 당신의 마음이 움직일 때까지, 이곳에서 한 발자국도 떠나지 않겠습니다!"
그 선언에, 용은 돌아보지 않은 채로 짧게 코웃음을 쳤다. 마치 길가의 돌멩이가 하는 말을 들은 것처럼, 아무런 감흥도 없는 반응이었다.
동굴 안에는 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세상에 등을 돌린 고대의 용과, 세상의 마지막 희망을 짊어진 재의 기사.
그들의 길고 긴 이야기는, 그렇게 완벽한 거절과 고집스러운 맹세로 그 첫 장을 열고 있었다.
-
시간은 의미가 없었다.
용의 둥지에는 해가 뜨고 지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다. 천장에 박힌 푸른 광석들이 영원처럼 희미한 빛을 발하고 있었기에, 낮인지 밤인지, 하루가 지났는지 사흘이 지났는지 알 길이 없었다.
알렌에게 시간은 오직 고통의 간격으로만 측정되었다. 숨을 쉴 때마다 욱신거리는 늑골, 불에 달군 쇠처럼 뜨거운 상처, 그리고 뼛속까지 스며드는 지독한 허기. 고룡이 일으킨 단 한 번의 충격은 그의 몸을 너덜너덜하게 만들었다.
처음 며칠은 그야말로 생존을 위한 사투였다. 알렌은 거의 기다시피 동굴 벽을 더듬어, 바위틈에서 간신히 배어 나오는 차가운 물로 목을 축였다. 정신을 잃을 때마다 마나의 마지막 얼굴이 떠올랐다. '심장을 잃지 마라.' 그 목소리는 꺼져가는 생명의 불씨를 붙드는 유일한 밧줄이었다.
그 모든 시간 동안, 용은 그를 없는 사람 취급했다.
옥좌에 누워 와인을 마시거나, 끝없는 잠을 자거나. 가끔씩은 거대한 보물 더미를 하염없이 내려다볼 뿐이었다. 마치 영겁의 세월에 마모되어 감정이라는 것 자체가 사라져버린 고대의 석상 같았다. 그는 알렌이 죽든 살든, 기어 나가든 썩어 문드러지든 아무 상관 없다는 태도였다. 어쩌면 그것은 마지막 시험이었을지도 모른다. 저 하찮은 인간이 언제쯤 절망하고 스러지는지 지켜보는, 신의 지루한 유희.
열흘쯤 지났을까. 알렌은 간신히 몸을 일으켜 세울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꼴을 내려다보았다. 찌그러진 갑옷, 피와 흙으로 더러워진 옷, 며칠째 이어진 허기로 바싹 마른 몸. 이래서는 기다린다 해도, 그저 초라하게 죽음을 맞는 것밖에 되지 않았다.
'기다리기로 했다면, 이렇게 끝나서는 안 돼.'
알렌은 마음을 다잡았다. 그는 동굴 구석, 비교적 평평한 공간을 찾아냈다. 그리고는 부러진 창대 조각으로 바닥의 먼지와 자갈들을 쓸어내기 시작했다. 아주 작고 초라하지만, 자신만의 공간을 만드는 행위였다.
"…흥."
옥좌 위에서 나른한 조소가 들려왔다.
"벌레가 집이라도 짓는 건가?"
알렌은 묵묵히 제 할 일을 계속하며 대답했다.
"기다리기로 약속했으니까요. 이대로 허무하게 죽을 순 없죠. 적어도 기사로서, 부끄럽지 않은 모습으로 기다리겠습니다."
"기사라..."
용은 중얼거리며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그의 눈에 스친 것은 경멸도, 비웃음도 아닌, 아주 옅은 그림자 같은 것이었다. 마치 아주 오래전, 빛바랜 기억을 들춘 듯한.
그날 이후, 알렌은 용의 둥지에 자신의 거처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는 매일 조금씩 자신의 영역을 넓혀나갔다. 썩은 보물 상자에서 땔감으로 쓸 만한 나무 조각들을 모았고, 동굴 안을 흐르는 지하수를 마실 수 있도록 작은 웅덩이를 팠다. 며칠을 굶은 끝에, 동굴 깊숙한 곳에 사는 작은 들짐승 한 마리를 겨우 사냥하는 데 성공했다.
알렌은 자신의 낡은 부싯돌과 부러진 검 조각을 마찰시켜 불을 피웠다. '탁, 타닥...' 마침내 작은 불꽃이 피어오르고, 동굴 한구석을 희미한 온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수천 년 만에 처음으로 용의 둥지에 피어난, 인간의 온기였다.
고기를 굽는 고소한 냄새가 퍼져나가자, 알렌은 잠시 망설였다. 굶주린 위장이 당장이라도 모든 걸 삼키라고 아우성쳤다. 하지만 그는 가장 잘 익은 살코기 한 점을 떼어 깨끗한 돌멩이 위에 올렸다. 그리고는 옥좌를 향해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저... 드시겠습니까?"
알렌은 긴장하며 그것을 내밀었다.
"변변치 않습니다만... 혼자 먹는 것보다는..."
용은 제단에 바쳐진 조악한 공물을 보는 듯한 표정으로, 알렌이 내민 돌멩이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입가에 노골적인 비웃음이 걸렸다.
"용이 그런 걸 먹을 것 같으냐, 꼬맹아?"
"아... 그건..."
"그보다, 그 꼴을 하고도 타인에게 무언가를 나눠줄 여유가 있나 보군. 네놈도 지금 굶어 죽기 직전일 텐데."
용의 붉은 눈이 흥미롭다는 듯 알렌을 관찰했다. 그의 질문에는 순수한 의문이 담겨 있었다.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알렌은 잠시 머뭇거리다, 나직하게 대답했다.
"함께 먹는 것이... 혼자 먹는 것보다 더 맛있다고, 돌아가신 아버지가 늘 말씀하셨습니다. 음식은 나눌수록 더 따뜻해지는 거라고..."
그것은 기사로서의 신념이 아닌, 그저 마나에게서 배운, 소박하고 따뜻한 삶의 방식이었다. 그 말을 하는 알렌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순간, 용의 표정이 미세하게 굳었다.
"죽은 자의 말에 얽매여 산 자가 굶는군. 인간이란 참으로 비효율적인 종족이야."
그는 차갑게 말하며 고개를 돌려버렸다. 더 이상 대화할 가치도 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알렌은 묵묵히 물러나 자신의 자리로 돌아왔다. 거절당할 줄 알았지만, 마음 한구석이 서운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는 홀로 딱딱하고 별 맛 없는 고기를 씹으며, 처음으로 그와 '대화'를 나눴다는 사실에 작은 의미를 두었다.
그날 밤, 알렌은 오랜만에 깊은 잠에 빠졌다. 상처와 허기, 그리고 낯선 곳에서의 긴장감으로 늘 선잠을 잤지만, 오늘은 따뜻한 불기운과 아주 오랜만에 배를 채웠다는 포만감이 그를 무겁게 짓눌렀다. 그는 꿈속에서 마나를 만났다. 재가 되어버린 왕국이 아닌, 햇살이 가득한 훈련장에서 땀 흘리던 어린 시절의 꿈이었다.
"흐윽... 마나..."
잠결에 흘러나온 작은 흐느낌.
그것을, 용은 듣고 있었다.
용은 보물 더미 위에서 잠든 소년을 지켜보았다. 열에 들떠 붉어진 뺨, 땀에 젖은 하얀 머리카락, 그리고 악몽에 시달리는 듯 미간을 찌푸린 채 무언가를 중얼거리는 모습. 시끄럽고, 귀찮고, 하찮은 벌레.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그의 눈에 비친 것은, 그저 돌아갈 곳을 잃고 상처 입은 어린 짐승일 뿐이었다.
"......"
용은 소리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보물 더미를 뒤져, 아주 오래전 북쪽의 어떤 왕에게서 빼앗은, 마법이 깃든 눈표범의 하얀 모피를 찾아냈다. 그리고는 잠든 알렌의 곁으로 다가갔다. 한참을 망설이듯 그를 내려다보던 용은, 썩 귀찮다는 표정으로 모피를 그의 몸 위에 아무렇게나 툭, 던져주었다.
"시끄럽게 앓는 소리가 귀에 거슬려서다."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을 변명을 중얼거리며, 그는 다시 자신의 옥좌로 돌아갔다.
차가운 동굴 공기에 떨고 있던 알렌의 몸 위로, 거짓말처럼 따뜻하고 부드러운 온기가 덮였다. 그는 무의식중에 모피를 끌어안으며, 한결 편안한 숨을 내쉬기 시작했다.
용의 둥지에 피어난 작은 불씨는 꺼지지 않았다.
그리고 영겁의 세월 동안 굳어있던 고룡의 마음에, 누구도 눈치채지 못한 아주 미세한 균열이 생기고 있었다.
-
눈을 떴을 때, 알렌을 감싸고 있는 것은 지독한 한기가 아닌, 믿을 수 없을 만큼 부드럽고 따스한 온기였다.
온몸을 짓누르던 열기는 거짓말처럼 사라져 있었다. 그는 마치 구름 속에 파묻힌 듯한 감각에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의 몸을 덮고 있던 것은 눈처럼 새하얀, 거대한 모피였다. 만져본 적 없는 부드러움, 그 안에는 희미하게 마력이 흘러 밤새 상처의 열기와 냉기를 다스려준 듯했다. 자신의 초라한 행색과는 어울리지 않는, 분명 용의 보물 중 하나일 터였다.
알렌은 고개를 돌려 옥좌를 보았다. 용은 여전히 미동도 없이 누워, 세상 모든 것에 무관심한 조각상처럼 보였다. 그가 한 짓일까? 어째서? 뇌리에 수만 가지 질문이 떠올랐지만, 알렌은 감히 그것을 입 밖으로 낼 수 없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몸에서 모피를 걷어냈다. 한 올의 먼지라도 묻을세라 조심스럽게, 그러나 반듯하게 개어 자신이 머무는 공간의 가장 깨끗한 자리에 올려두었다. 감사의 인사를 할 수도, 이것이 어찌 된 일이냐고 물을 수도 없었다. 그저 침묵의 행동으로, 자신은 이 호의를 인지하고 있으며 존중한다는 뜻을 표할 뿐이었다.
그날 이후, 용의 둥지에는 기묘한 일상이 자리 잡았다.
알렌은 더 이상 용에게 섣불리 말을 걸거나 무언가를 청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자신의 '삶'을 묵묵히 살아냈다. 아침-이라고 짐작되는 시간-에 일어나면 동굴 벽을 타고 흐르는 지하수로 세수를 하고, 동굴 구석구석을 탐사하며 식량이 될 만한 것을 찾아다녔다. 이따금씩 빛을 싫어하는 버섯이나 작은 들짐승 따위를 발견하는 것이 수확의 전부였지만, 그는 그것만으로도 감사했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는 검을 들었다. 아직 성치 않은 몸이었지만, 하루라도 훈련을 거르면 기사의 감을 잃는다는 마나의 가르침 때문이었다. '휙, 휙.' 보물들 사이의 작은 공터에서, 낡은 검이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려 퍼졌다.
붉은 용은 여전히 아무런 관심이 없는 듯 보였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아주 가끔, 무심결에 소리가 나는 쪽을 향했다. 땀 흘리며 검을 휘두르는 하얀 머리의 소년. 그 서툴지만 올곧은 검술에서, 그는 아주 오래전 잊었던 어떤 풍경의 잔상을 보았다.
그날 저녁, 알렌은 모닥불 앞에 앉아 있었다. 동굴의 적막은 때로 사람의 정신을 갉아먹는다. 그는 외로움을 이겨내기 위해, 그리고 잊지 않기 위해, 스스로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알비온 왕국의 건국 신화나 위대한 영웅들의 서사시 같은 것들이었다.
"…그렇게 제 1기사단장은, 단신으로 흑마법사의 군대를 물리치고 왕국의 평화를 지켜냈습니다."
그때, 어둠 속에서 나른한 목소리가 찬물을 끼얹었다.
"그 영광스러운 기사단장도 결국엔 늙고 병들어 한 줌 재가 되었지. 인간의 영광이란 참으로 덧없는 것이야."
알렌은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다음 날부터는 다른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의 이야기는 이제 역사책에 기록된 영웅담이 아닌, 그의 기억 속에 살아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바뀌었다.
어느 날 밤, 알렌은 특히나 말이 많았다. 불길을 보며 미소짓는 그의 얼굴은 어딘가 씁쓸해 보였다.
"제 양 아버지는… 광대였습니다."
옥좌의 용이 살짝 고개를 드는 것을, 알렌은 눈치채지 못했다.
"슬픈 사람이 있으면 어떻게든 웃게 만들어 주셨죠. 아주 서툰 마술을 보여주거나, 우스꽝스러운 노래를 부르면서요. 아버지는 그게 기사의 첫 번째 의무라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의 미소를 지키는 것. 검은 그 다음이라고요."
알렌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거대한 동굴을 가득 채울 만큼의 온기를 담고 있었다. 그 순간, 용의 목소리가 이전보다 훨씬 날카롭게 그 온기를 갈랐다.
"미소? 하찮군. 검으로 지켜야 할 것은 영토와 힘이다. 그런 눈에 보이지도 않는 뜬구름 같은 감정이 아니야."
"아닙니다."
알렌은 고개를 저으며, 처음으로 붉은 용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의 눈은 불꽃을 담은 듯 단단했다.
"영토는 다시 찾을 수 있고, 힘은 다시 기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미소를 잃은 백성은… 이미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항상 웃으셨습니다. '노아'가 모든 것을 앗아가는 그 순간까지도, 저를 보며 웃어주셨습니다. 제 심장이 꺼지지 않도록..."
그 말에, 용은 대답이 없었다. 그는 알렌의 눈 속에 담긴, 슬픔보다 더 깊은 어떤 것을 보았다. 덧없다고 비웃었던 '감정'이, 한 소년을 지탱하는 유일한 기둥이 되어 빛나고 있었다. 그 빛은 용의 가장 깊은 곳에 잠들어 있던, 피와 배신으로 얼룩진 기억의 파편을 건드렸다. 자신을 향해 웃어주던, 그러나 결국 지키지 못했던 어떤 인간의 얼굴. 용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며 다시 기나긴 침묵 속으로 잠겨들었다.
동굴 안에는 타닥거리는 장작 소리만이 한참 동안 울려 퍼졌다. 알렌은 자신이 너무 많은 말을 했다고 후회했다. 용의 심기를 건드린 것이 분명했다.
그때, 그가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어쩌면 지금이 아니면, 영원히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괜찮으시다면…."
알렌은 마른침을 삼켰다.
"당신의 성함을,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전설 속 이름이 아닌, 눈앞의 존재에게 직접 묻는 이름. 전설 속의 그가 아닌, 눈 앞에 있는 진짜 그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용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붉은 눈이 어둠 속에서 알렌을 꿰뚫어 보았다. 당장이라도 불호령을 내리거나, 지난번처럼 그를 날려버릴 것 같은 험악한 기운이 흘렀다. 알렌은 숨을 죽였다.
하지만 이어진 것은 분노가 아니었다. 아주 길고, 깊은, 수천 년의 세월이 담긴 듯한 한숨 소리였다.
"...크로스다."
그것은 전설 속 이름, '묵시록의 붉은 용' '고대의 재앙' 따위의 이름이 아니었다. 불필요한 모든 것을 떼어낸, 단 하나의 이름. 그는 스스로를 '크로스'라고 칭했다.
알렌의 눈이 아주 살짝, 커졌다. 그는 끓어오르는 감정을 억누르며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예를 갖추기 위함이었지만, 어쩐지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크로스 님."
알렌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 순간, 용의 둥지 안에서, 기사와 용은 비로소 서로의 존재를 마주보기 시작했다.
-
이름을 나눈 다음 날, 동굴의 공기는 미묘하게 달라져 있었다. 여전히 그곳을 지배하는 것은 영겁의 침묵이었지만, 더 이상 상대를 향한 경계심이나 팽팽한 긴장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알렌이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자신이 잠들었던 자리 근처에 이전에는 없던 것들이 놓여 있었다. 동굴 이끼 중에서도 독성이 없고, 희미하게 빛을 발하는 푸른 버섯 몇 송이와 물기 어린 열매 몇 알. 누가 봐도 사람이 가져다 놓은 것이었다. 알렌은 옥좌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크로스는 여전히 잠든 듯 미동도 없었지만, 알렌은 알고 있었다.
이것이 용의 방식이라는 것을.
직접적인 말이 아닌, 무심한 행동으로 건네는, 아주 서툰 형태의 배려라는 것을.
알렌은 작은 목소리로 공기 중에 흩어질 인사를 건넸다.
"…감사히 먹겠습니다, 크로스 님."
대답은 없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족했다.
그날 오후, 알렌은 어김없이 검을 들었다. 텅 빈 위장을 채우자 몸에 기운이 돌았다. 마나에게 배운 검술의 기본 자세를 천천히 되짚으며 호흡을 골랐다. 이제는 그의 일과가 된 이 훈련을, 크로스는 처음으로 잠자코 지켜보고만 있지 않았다.
"흥. 그따위 엉터리 검술로 뭘 지키겠다는 거지?"
옥좌 위에서, 잠겨 있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단순한 비웃음이 아닌, 명백한 '관심'이 담긴 목소리였다.
알렌은 검을 휘두르다 말고 멈춰 섰다. 땀이 턱을 타고 흘러내렸다.
"이것은… 아버지께서 가르쳐주신 검술입니다. 사람을 베는 검이 아니라, 지키는 검이라고 하셨습니다."
"지키는 검?"
크로스가 소리 내어 웃었다. 텅 빈 동굴에 그의 웃음소리가 서늘하게 울려 퍼졌다.
"그런 건 없다, 꼬맹아. 세상의 모든 검은 결국 무언가를 파괴하기 위해 존재할 뿐이다. 베지 않고 어떻게 지키지? 네놈의 아비는 위선자였거나, 대책 없는 바보였군."
마나를 향한 직접적인 모욕에, 알렌의 얼굴이 굳어졌다.
"아버지를 모욕하지 마십시오!"
"사실을 말했을 뿐이다."
크로스는 몸을 일으켜 앉으며, 처음으로 알렌에게 제대로 된 시선을 주었다. 그 눈은 상대를 꿰뚫어 보는 듯 예리했다.
"정말로 '지키는 검'이었다면, 그 아버지란 자는 지금 어디에 있나. 그 고결한 검으로 제 한 몸 지키지는 못했나 보군."
"……!"
알렌의 손에 쥔 검이 파르르 떨렸다. 크로스의 말은 가장 아픈 상처를 후벼 파는 비수였다. 하지만 피할 수는 없었다. 이 존재를 설득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모든 것을 드러내야만 했다.
알렌은 검을 내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버지는, 싸우다 돌아가신 게 아닙니다."
그의 목소리는 물에 젖은 듯 무거웠다.
"왕국을 덮친 '노아'는 단순한 군대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살아있는 모든 것의 존재를 증오하는 저주와도 같았습니다. 생명을 재로 만들고, 희망을 절망으로 타락시키는 재앙이었죠."
알렌의 눈앞에 그날의 풍경이 다시 펼쳐졌다. 불타는 도시, 비명을 지르는 사람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비웃듯 번져나가던 잿빛의 침식.
"아버지는 마지막까지 싸우셨습니다. 백성들이 도망칠 시간을 벌기 위해서요. 하지만 그분은… 저주에 잠식당하셨습니다. '노아'의 저주는 사람을 안에서부터 무너뜨립니다. 아버지는 저를 지키기 위해… 마지막 힘을 다해 저를 밀어내고는, 스스로 재가 되어…"
차마 말을 끝맺지 못하고, 알렌은 입술을 깨물었다. 눈물이 턱을 타고 낡은 갑옷 위로 떨어졌다.
그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크로스의 얼굴에서 모든 표정이 사라져 있었다. 냉소도, 권태도, 조소도 없이, 그저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 같은 눈으로 알렌을 응시할 뿐이었다. 한참의 침묵 끝에, 그가 전혀 예상치 못한 질문을 던졌다.
"그 '노아'라는 것…"
크로스의 목소리는 기묘하게 잠겨 있었다.
"재앙을 퍼뜨리는 주모자의 이마에 새겨진 문장은, 어떤 모양이었나?"
알렌은 고개를 들었다. 뜻밖의 질문이었지만, 그 문장은 악몽처럼 기억에 새겨져 있었다.
"일렬로 늘어선… 십자가였습니다. 검은 별과 함께…"
그 순간이었다.
크로스의 어깨가 아주 미세하게, 거의 알아차릴 수 없을 정도로 움찔했다. 그는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자신의 이마를 덮고 있는 검붉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그리고 알렌은 보았다.
크로스의 관자놀이 부근, 머리카락에 가려진 피부 위에 새겨진, 아주 오래되고 희미한 흉터를.
형태는 달랐다. 십자가가 아닌, 뒤틀린 덩굴이나 가시 같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평범한 상처가 아닌, '노아'의 그것과 같은 종류의 저주받은 낙인이라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수천 년의 세월에도 지워지지 않은, 고통의 흔적.
크로스는 알렌의 시선을 느끼고는, 곧바로 머리카락을 내려 흉터를 가렸다. 그는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침묵은 그 어떤 말보다도 더 많은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 또한 싸웠다.
그 또한 잃었다.
세상을 등진 용의 냉소는, 그저 권태가 아니었다. 끔찍한 패배 끝에 남겨진, 깊고 오래된 상처의 다른 이름이었다.
알렌은 그의 안에서 소문만 무성한 '전설 속의 악룡' 이 아니라, 같은 적에게 모든 것을 잃고 홀로 상처를 삭이고 있는, 고독한 존재를 보았다.
그날 이후, 알렌은 더 이상 왕국을 구해달라 청하지 않았다.
알렌은 더 이상 크로스에게 매달리지 않았고, 크로스 또한 알렌을 없는 사람 취급하지 않았다. 그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서로의 존재를 뚜렷하게 인지하며 기묘한 동거를 이어갔다. 알렌은 매일 검술 훈련을 하고, 동굴을 탐사하며 식량을 구했다. 크로스는 그런 알렌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그 시선에는 이제 경멸이나 권태 대신, 가늠하기 힘든 복잡한 상념이 담겨 있었다.
변화는 예고 없이 찾아왔다.
그날도 알렌은 낡은 검을 휘두르며 땀을 쏟고 있었다. 마나의 검술은 방어와 반격에 특화된, 말 그대로 '지키기 위한' 검술이었다. 하지만 지금 알렌에게는 지켜야 할 대상이 없었다. 그의 검은 공허한 허공만을 가를 뿐이었다.
"그따위 엉터리 검술로는 '노아'의 졸개 하나 베지 못한다."
차가운 목소리가 훈련에 열중하던 알렌의 등 뒤에 꽂혔다. 그는 어느새 옥좌에서 내려와, 팔짱을 낀 채 알렌을 지켜보고 있었다.
"따라와라, 꼬맹이."
크로스는 그 말만 남기고 동굴의 더 깊은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알렌은 잠시 망설였지만, 이내 검을 챙겨 들고 그의 뒤를 따랐다. 크로스가 먼저 자신에게 무언가를 제안한 것은 처음이었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보물이 쌓인 중앙 홀이 아니었다. 크로스가 벽의 특정 부분을 손으로 짚자, 거대한 석문이 소리 없이 열리며 새로운 공간이 드러났다. 그곳은 금은보화 대신, 아득할 정도로 오래된 책과 두루마리, 석판들로 가득 차 있었다. 마치 시간의 흐름이 멈춰버린 거대한 도서관, 혹은 역사의 무덤과도 같은 곳이었다.
"인간들이 '역사'라 부르며 스스로를 위안하는 기록들의 무덤이다."
크로스가 먼지 쌓인 공기 속에 말했다.
"나는 이곳에서 수만 년간 지켜보기만 했다. 너희 인간들이 얼마나 어리석게 태어나고, 사랑하고, 배신하고, 죽어가는지를."
그는 서고 깊숙한 곳으로 알렌을 이끌었다.
"네놈이 말한 그 '노아'… 놈들은 역사의 표면에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오래된 역병이다. 문명이 가장 찬란하게 꽃피울 때쯤 나타나, 모든 것을 재로 만들고 사라지지."
크로스는 한쪽 벽을 가득 채운 낡은 양피지 두루마리 중 하나를 꺼내 들었다. '타닥' 소리를 내며 펼쳐진 두루마리에는, 알렌이 알아볼 수 없는 고대의 문자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읽을 수 있겠나?"
알렌이 고개를 젓자, 크로스는 귀찮다는 듯 혀를 차며 직접 해독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3천 년 전, 사막에 존재했던 한 위대한 왕국에 대한 기록이었다. 기록 속 왕국은 '노아'에 의해 멸망했다. 재앙의 묘사는 알비온이 겪었던 것과 소름 끼칠 정도로 똑같았다. 재앙의 중심에는 검은 별과 십자가 문장을 가진 자가 있었고, 그의 군대는 'AKUMA'라 불리는, 슬픔을 먹고 태어난 기계 병기들이었다.
알렌은 숨을 죽인 채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크로스의 담담한 목소리를 통해, 그는 자신의 싸움이 결코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음을 깨닫고 있었다.
"...왕국의 마지막 기사단장은 '산의 수호자'와 함께 '노아'에 맞섰으나, 동료의 배신으로 인해 결국 타락한 왕의 손에 죽음을 맞이했다. 수호자는 기사를 지키지 못했고, 홀로 남아 모든 것이 재로 변하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거기까지 읽어 내리던 크로스의 목소리가 아주 미세하게, 그러나 분명하게 잠겼다. 그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알렌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 기록에 나오는 '산의 수호자'는… 혹시 크로스 님입니까?"
크로스는 대답 대신, 손가락으로 두루마리의 다른 부분을 가리켰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중요한 건 이것이지."
그가 가리킨 곳에는 'AKUMA'의 동력원과 약점에 대한 분석이 적혀 있었다.
"'노아'는 인간의 '슬픔'과 '사랑'을 이용해 군대를 만든다. 가장 순수한 감정을 가장 추악한 무기로 바꾸는 것, 그것이 놈들의 방식이다."
하지만 알렌의 시선은 크로스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는 크로스의 마음속에서 휘몰아치고 있을 수천 년 묵은 폭풍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그분을… 지키고 싶으셨군요. 크로스 님은."
알렌의 나직한 말에, 크로스의 어깨가 굳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알렌을 보았다. 알렌의 눈에는 동정이나 연민이 아니었다. 같은 아픔을 겪은 자만이 보낼 수 있는, 깊은 이해와 공감이 담겨 있었다.
크로스는 한참 동안 말이 없다가, 결국 두루마리를 거칠게 말아버렸다.
"…쓸데없는 소리."
그는 서고를 나와 다시 훈련장으로 쓰이던 공터로 향했다. 분위기는 전보다 훨씬 무거워져 있었다. 크로스는 근처에 뒹굴던 튼튼한 나뭇가지를 하나 집어 들고는 알렌을 향해 턱짓했다.
"검을 들어라, 꼬맹이."
"네?"
"네놈의 검은 마음만 앞서있다. 진정으로 '지키는 검'이란 건, 상대를 죽이지 않는 무딘 칼날이 아니다. 소중한 것을 잃기 전에, 위협의 근원을 누구보다 빠르고 정확하게 베어내는 것이다."
크로스는 말을 마치자마자 나뭇가지를 휘둘렀다. 알렌은 본능적으로 검을 들어 막았지만, '쨍!' 하는 소리와 함께 손목에 엄청난 충격이 전해지며 검을 놓치고 말았다.
"네놈의 아비는 반쪽짜리만 가르쳤군. 사람을 지키는 '마음'을 가르쳤지만, 지켜낼 '힘'을 가르치진 못했어. 나머지 반은, 내가 가르쳐주지."
그날부터, 용의 둥지에는 맹렬한 쇳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고대의 용과 멸망한 왕국의 마지막 기사.
같은 상처를 공유한 두 존재는, 마침내 같은 적을 향해 검을 맞대기 시작했다. 그것은 복수를 위한 것도, 왕국을 위한 것도 아니었다.
소중한 것을 잃지 않기 위해서.
-
크로스의 훈련은 가르침이라기보다는 일방적인 파괴에 가까웠다.
그의 손에 들린 것은 고작 낡은 나뭇가지 하나였지만, 알렌의 강철 검과 맞부딪칠 때마다 쇠를 깎는 굉음이 울렸다. 나뭇가지는 부러지기는커녕, 오히려 알렌의 검을 튕겨내고 그의 몸 곳곳에 멍 자국을 새겼다. 크로스의 움직임에는 한 치의 낭비도 없었다.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알렌의 허점을 파고들고, 그의 자세를 무너뜨리고, 손에서 검을 놓치게 만들었다.
매일 밤, 알렌은 온몸에 피멍이 든 채 자신의 작은 캠프로 기어 돌아왔다. 육체의 고통보다 더 견디기 힘든 것은 정신적인 무력감이었다.
"네놈의 검에는 망설임이 가득하다."
훈련 도중, 크로스가 차갑게 말했다. 그의 나뭇가지가 알렌의 목 바로 앞에서 멈춰 있었다.
"적의 목을 베기 직전에 멈칫하는 그 찰나의 동정이, 결국 네놈과 네놈이 지키려는 모든 것을 죽일 것이다."
"아버지는… 생명의 무게를 알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죽은 자의 잠꼬대일 뿐이다."
크로스는 가차없이 알렌의 손목을 후려쳐 검을 떨어뜨렸다.
"네놈이 지켜야 할 생명의 무게가 소중하다면, 그것을 위협하는 것의 무게는 가차없이 0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힘의 본질이야."
알렌은 혼란스러웠다. 마나의 가르침은 그의 모든 것이었다. 지키는 검. 사람을 살리는 검. 하지만 크로스는 그 모든 것을 정면으로 부정했다. 그의 논리는 잔혹했지만, '노아'에게 모든 것을 잃은 알렌에게는 뼈아픈 설득력을 가졌다. 자신이 조금 더 강했더라면. 망설이지 않았더라면. 마나를 지킬 수 있었을까.
그렇게 한 달쯤 지났을까. 반복되는 패배와 혹독한 가르침에 알렌의 몸과 마음이 한계에 다다른 어느 날이었다. 그는 또다시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더 이상 일어설 힘도 남아있지 않았다.
"왜…"
알렌이 쉰 목소리로 물었다.
"왜 저에게 검술을 가르쳐주시는 겁니까? 당신은 인간들의 싸움에 관심 없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크로스는 잠시 알렌을 내려다보다가, 시선을 들어 동굴 천장의 어둠을 향했다. 그의 얼굴에 수천 년의 권태와, 그보다 더 깊은 피로감이 스쳐 지나갔다.
"나는 수천 년을 지켜봤다."
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낮고 무거웠다.
"너처럼 '지키겠다'고 외치던 멍청이들이, 그 무른 마음 때문에 결국 제 손으로 모든 것을 잿더미로 만드는 꼴을."
크로스의 시선이 다시 알렌에게로 향했다. 그 눈빛은 단순한 스승이 제자를 보는 눈이 아니었다. 아주 오래전, 되돌릴 수 없는 과거를 보는 듯한 눈이었다.
"나는 네놈이 마음에 들어서 이러는 게 아니다, 꼬맹아. 다만, 내 눈앞에서 또다시 역겨운 비극이 반복되는 꼴은 보고 싶지 않을 뿐이다. 지키고 싶다면, 신념만으로 어설프게 검을 휘두르지 마라. 네놈의 심장이 뜨거운 만큼, 네놈의 칼끝은 더 차갑고 단단하게 만들어라."
그의 말은 잔혹했지만, 그 안에는 기묘한 진심이 담겨 있었다. 그것은 알렌을 향한 가르침이자, 과거의 누군가에게 끝내 해주지 못했던 말처럼 들렸다. 알렌은 그제야 깨달았다. 크로스의 이 혹독한 훈련이, 실은 그만의 방식대로 과거의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는 처절한 몸부림이라는 것을.
그날 이후, 알렌의 검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는 더 이상 마나의 가르침과 크로스의 가르침 사이에서 혼란스러워하지 않았다. 두 개의 가르침을 하나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마음에는 마나의 온기를 품고, 칼끝에는 크로스의 냉혹함을 담았다. 방어는 지키기 위함이되, 공격은 파괴하기 위함이었다. 그의 검술은 점차 마나의 유연함과 크로스의 치명적인 효율성을 모두 갖춘, 그 누구도 본 적 없는 새로운 형태로 진화해나가고 있었다.
어느 날 저녁, 훈련이 끝난 후였다. 크로스는 말없이 동굴 밖으로 나갔다가, 거대한 멧돼지 한 마리를 어깨에 들쳐메고 돌아왔다. 그가 피운 불은 알렌의 모닥불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거대하고 뜨거웠다. 기름진 고기가 익어가는 냄새가 동굴을 가득 채웠다.
알렌은 평소처럼, 가장 잘 익은 부위를 잘라내 깨끗한 돌 접시에 담아 크로스에게 내밀었다. 예전이라면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크로스는 말없이 그것을 받아들였다. 그는 옥좌가 아닌, 불을 중심으로 알렌과 적당한 거리를 둔 곳에 자리를 잡았다.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각자의 식사를 시작했다. 거대한 동굴 안에는 타오르는 장작 소리와, 고기를 뜯는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대화는 없었지만, 그 어떤 말보다도 많은 것을 나누고 있었다.
혹독한 훈련, 함께하는 식사, 그리고 서로의 상처에 대한 침묵의 이해.
고대의 용과 왕국의 마지막 기사는, 그렇게 세상에서 가장 기묘한 형태의 스승과 제자가 되어가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그들은 서로의 존재를 담금질하며 조용히, 그러나 강하게 다시 태어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