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HB 크오페스 사건]

 

[속보] 엘리후 오르피어스, 차기작 아마존 프라임 오리지널 <블러드하운드 버디> 확정. 파격적인 'BL 장르' 도전.

 

 

엘리후 오르피어스. 

 

아역 시절부터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단 한 번의 추락도, 논란도, 심지어 흔들림조차 없었던 남자. 스크린 속 그는 언제나 절대적인 강자, 모두가 허를 내두르는 재벌, 남자중의 남자 뭐, 그런 모습을 연기했다. … 뭐, 요즘 말로 말하자면 '테토남' 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 188cm, 90kg의 완벽하게 조율된 근육질의 육체는, 그 자체로 '이상적인 남성'의 표본처럼 보였다. 스턴트 없이 거친 액션을 소화하는 그의 모습은 여성들 뿐만 아니라 남성팬의 마음까지 훔쳐버렸다.

 

팬들에게 그는 얼음으로 조각한 신상(神像)이었다. 완벽하고, 견고하며, 결코 인간적인 욕망 따위는 내비치지 않을 것만 같은 신같은 존재.

 

그런 그가 BL을, 그것도 <블러드하운드 버디>에 주인'수' 역할로 참여한다고 선언한 것이다. 

 

<블러드하운드 버디> 통칭 BHB. 하드보일드 수사물에 BL요소를 가미한 작품으로 2년 전 동인계를 휩쓸었던 리x북스관심수 4만의 인기BL. 

 

공시점 소설로 주인공 '하야미 카이토' 가 경찰청 수사 1과에 들어가 수사 1과의 이단아  '키리시마 레이' 의 파트너가 되면서 일어나는 일을 그린 작품이다. 미남수x미남공이라는 설정에 후배x선배, 연하공x연상수, 구원서사, 어쩐지 처연한 분위기를 흘리고 다니는 까칠한 외국계 쿼터의 선배. 오타쿠라면 무조건 좋아할 요소를 잔뜩 넣어놓은 아주 클래식한 BL이라고 할 수 있겠다. 나왔을 당시에도 한번 읽기 시작하면 멈출 수 없다는 몰아치는 전개, 후반부의 격정적인 감정선으로 호평을 받았다. 이 작품이 유명한 이유는 더 있었는데, 그건 바로… 높은 수위. 특히 뒤로 갈수록 씬 묘사가 물이 올른다. 그 정점에 있는 것이 바로 전설의 호텔씬. 카이토와 레이가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처음으로 몸을 겹치는…-후략-

 

그런 BHB에 특이한 점이 하나 있다면 작품의 어디를 봐도 등장인물의 외형묘사가 많지 않다는 점이다. 특히 오타쿠들이 아주 중요하기 여기는 키 묘사가 빠져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BHB의 드라마화가 발표된 것이다. 거기에 '수' 역할에 대배우 '엘리후 오르피어스' 가 출연한다는 소식까지.

 

 

 

BHB의 파격적인 '주인수' 캐스팅에 타임라인은 자정을 넘긴 시각에도 마비 상태였다.

 

 

이웃집도둑놈@tonari_dorobo

엘리후 오르피어스가 BL? 근데 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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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먹자@Gtl145_A

엥? 진짜? 아니 왜? 개구라같은데 이렇게 호화캐스팅하면

나머지 예산은 어떡함? 종이로 그려서 세트장 만들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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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인공른만함 1차 BL 사랑러♡@gfgre25gfdf11

엘리후는 공타입인뎅 ㅠㅠ 공수 반대였으면 재미있게 봤을듯ㅠㅠ

아쉽당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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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총공충@B24423

   지랄하네 ㅋㅋㅋ 마음에안들면 꺼져 응 난 원래 키작공 떡대수라고     

   생각하고 보고 있었어~ 세상에 널린게 미인수인데

   그거 보러가 초치지말고

 

   한마디@1fuck

   바이오 보니 수준 알만하다 주인공른충이 ㅅㄲ들 또 분탕치네

 

 

그리고 정확히 48시간 뒤, 그 균열을 비집고 두 번째 이름이 세상에 공표되었다.

 

[단독] <블러드하운드 버디> 파트너 役, 신인 아이돌 'ZERO-ONE' 리더 아카바네 신타로 파격 발탁.

 

트위터의 타임라인이 다시 한 번 소란스러워졌다.

 

아카바네 신타로. 데뷔 1년 차, 무대 위에서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붉은 머리칼을 흩날리며 '연하남', '순수', '아기강아지' 따위의 단어로 소비되던 스물한 살의 아이돌.

 

엘리후 오르피어스라는 아름다운 작품에 웬 먼지 한톨이 붙은 수준이었다.

 

커피바라@baracoff

엥?... 애매한데? 얘도 작은건 아닌데 공수 키차이가 좀;;;

 

돈내놔@186x179

아카바네 신타로? 그 빨간머리 아님? 이정도면 아들뻘인데

 

미인수만먹음. (인용시 차단)@1x44_BLlove

아니 잠만... 신타로가 공이고 엘리후가 수라고? 피지컬 반대 아님?

진짜 요즘 세상이 ㅈㄴ 거꾸로 돌아가고 있네 에휴 ㅉㅉ

 

키작공충@165x189

아니 니들 먹으라고 나온 드라마도 아닌데

지랄하지말고 집가서 발닦고 잠이나 쳐자 이 틀딱새끼들아

그래봤자 인기 ㅈㄴ많음 ㅅㄱ 키작공 탄압해봤자 더 작아지기만할뿐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대중의 반응은 다소 미묘한 지점이 있었다. '기대 된다.' '확실히 얼굴합은 괜찮은 것 같다.' 는 긍적적인 반응과 '캐스팅이 별로다.' '반대인 게 더 좋을 것 같다.' 는 부정적인 반응이 동시에 터져나왔다. 파격적인 캐스팅은 상당한 화제를 불러일으키고, 인터넷상의 화제는 싸움을 불러일으킨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때 동인녀들 사이에서 공수 외형, 캐스팅 호불호 따위를 두고 3일 밤낮으로 싸움이 벌어졌다고 한다.

이 사건은 2.5D 오타쿠들 사이에서 'BHB공수대첩 사건' 이라고 불리게 된다.

 

"끄으으응... 하아!"

 

그 시각, 아카바네 신타로는 소속사 연습실 바닥에 몸을 내던지듯 누워있었다. 땀으로 흠뻑 젖은 머리카락이 뺨에 달라붙어 축축했다. 격렬한 안무 연습으로 폐가 터질 것 같았지만, 그 와중에도 입은 쉬지 않았다.

 

"봤어, 봤어?! 방금 내 턴! 완전 깔끔했지? 예술이었지?"

 

고된 연습으로 방전된 멤버들이 대꾸할 힘도 없다는 듯 손만 휘휘 저었다.

 

"시끄러... 물이나 가져와." 

"이제 관심도 안 주는 거냐..."

 

특유의 '나 삐졌어요.' 라는 자세로 허리에 손을 짚고 뾰로통하게 일어나려던 순간. 삑- 삑- 하고 바닥에 던져둔 스마트폰이 울렸다. 화면을 보니 매니저형이었다.

 

"여보세요? 형! 나 방금 완전 멋있었는데. 형이 이걸 꼭 봤어야-" [...신타로. 너... 됐다.] "어? 뭐가? 나 휴가? 드디어?" [<블러드하운드 버디>. 최종 합격이래.]

 

"......"

 

정적이 흘렀다. 방금까지 시끄러웠던 연습실이 일순간 음소거 됐다.

 

[...신타로? 듣고 있어? 너 '하야미 카이토' 역이라고. 상대역은 엘리후 오르피어스 씨다. 정신 똑바로 차려라. 이따 스케줄 끝나고 보자.]

 

"......하?"

 

"......하하."

 

"......하하하하하!!"

 

신타로가 갑자기 폭소를 터뜨렸다. 유치한 장난기 가득한 웃음이 아닌라 좋은건지 싫은건지 알 수 없는 실소. 멤버들이 저 자식이 드디어 미쳤나 싶은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야... 야, 방금 들었어?" 

 

"뭘." 

 

"나... <블러드하운드 버디>... 합격했대."

 

멤버의 눈이 커졌다. 

 

"뭐? 진짜? 그 오디션? 상대역은 누구래?"

 

"엘리후 오르피어스..."

 

신타로는 그 이름을 성호를 긋듯 경건하게 읊조렸다. 연습실을 방방 뛰어다니는 대신, 그는 천천히 제 가방으로 걸어갔다.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이건 기쁨이나 환희가 아니었다. 그것은... 임계점을 넘어버린 전율. 마치 최고 난이도의 보스 몬스터가 눈앞에 나타난 것 같은, '공포'와 '기대감'의 그 사이 어딘가.

 

신타로에게 엘리후 오르피어스는 '우상'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언젠가 반드시 넘어보고 싶은 벽이었다.

 

그는 너덜너덜한 대본을 가방에서 꺼내 들었다. 그가 오디션에 지원했던 것은, 그저 '엘리후 오르피어스가 출연하는 작품'의 오디션 현장 공기라도 맡아보고 싶다는 불순한 팬심 때문이었다. 그런데 덜컥, 주연. 그것도 '주인공' 역할이라니.

 

신타로는 문제의 그 페이지를 펼쳤다. 손끝이 저릿했다.

 

[창고 안, 패닉에 빠진 키리시마를 거칠게 벽으로 밀어붙인다. 도망치려는 그의 양 손목을 결박하고, 그 위에 올라타 속삭인다.]

 

카이토: "정신 차려요, 선배. ...내가 있잖아."

 

"...푸흡."

 

웃음이 터졌다. 동시에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무섭고, 떨리고, 긴장되는데... 그런데...

 

"......이거... 너무 기대된다!"

 

신타로는 거울 앞에 섰다. 땀과 흥분으로 상기된, 바보 같은 제 얼굴이 비쳤다. '내가... 저 사람을 덮친다고?'

 

이보다 더 흥분되는 일이 세상에 또 있을까?

 

물론, 그는 연기 경험이 전무한 신인이고 엘리후는 할리우드최고의 배우였다. 이건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게 아니라, 계란이 에베레스트산을 굴러서 오르겠다는 선언이나 마찬가지였다.

 

"좋았어-!"

 

그는 제 양 뺨을 '짝!' 소리가 나게 내리쳤다.

 

"이건... 이건 기회야! 무서워할 시간이 어딨어."

 

공포? 부담감? 그런 건 지금 당장 부딪혀서 깨부수면 그만이다. 그는 원래 말보다 행동이 앞서는 타입이었다.

 

"두고 보라구."

 

그는 거울 속 자신을 향해, 아니, 어쩌면 거울 너머에 있을 그의 우상을 향해 선전포고하듯 외쳤다.

 

"멋있게 해내서, 오르피어스 씨가 '너 이 자식... 제법이잖아?' 하고 말하게 만들 테니까."

 

근거 없는 자신감과 주체할 수 없는 흥분, 그리고 그 밑바닥에 깔린 아찔한 긴장감. 스물한 살의 아이돌은 그렇게, 활활 불타고 있었다.

 

같은 시각, 도시의 야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미니멀한 펜트하우스. 엘리후 오르피어스는 막 샤워를 마친 듯, 젖은 백발을 수건으로 털며 태블릿PC를 켰다.

 

화면 가득, 방금 확정된 파트너의 프로필이 떠올랐다. '아카바네 신타로'. 링크된 영상에서는 붉은 머리의 소년이, 온몸이 부서져라 춤을 추며 바보처럼 환하게 웃고 있었다.

 

엘리후는 그 유치하고 소란스러운 영상을 무표정하게 바라보았다. 그의 푸른 눈동자에는 어떠한 감흥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영상을 껐다. 그리고 다시, <블러드하운드 버디>의 대본을 펼쳤다. 그의 시선이 머문 곳은, '키리시마 레이'가 가장 처절하게 무너지는 마지막 독백이었다.

 

 

 

-

 

 

 

 

첫 대본 리딩까지, 앞으로 사흘. 

 

사흘이라는 시간은, 누군가에게는 찰나였고 누군가에게는 영겁이었다.

 

아카바네 신타로에게 그 사흘은, 천국과 지옥을 롤러코스터처럼 오가는 정신없는 시간이었다. ‘엘리후 오르피어스와 연기를 한다’는 흥분이 정수리를 뚫고 치솟았다가도, ‘저 사람 앞에서 내가 감히’라는 공포가 발밑을 꺼트렸다. 그는 제멋대로인 성격답게 밤새 대본을 붙들고 ‘하야미 카이토’의 대사를 수백 번 외쳤다.

 

"정신 차려요, 선배! ...내가 있잖아!"

 

텅 빈 원룸에서 홀로 외치는 대사는 꽤나 '멋있었다'. 그래, 이 정도면 엘리후 씨도 '오, 제법인데?' 하고 봐주지 않을까? 그는 특유의 근거 없는 자신감에 차올라, 대본 리딩 당일, 누구보다도 요란한 붉은색 자켓을 입고 나섰다.

 

그러나 TV 도쿄의 육중한 회전문이 그의 몸을 삼키는 순간, 어젯밤의 그 활기 넘치던 바보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

 

등골을 타고 오르는 것은 싸늘한 긴장감이었다. 이미 도착한 작가진과 감독, 그리고 낯선 조연 배우들이 가득한 회의실. 신타로는 제 심장이 목구멍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아 마른침을 삼켰다.

 

"아, 아카바네 신타로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의 목소리는 필요 이상으로 컸고, 90도로 숙인 허리는 어딘가 뻣뻣했다. 몇몇이 그를 흥미롭다는 듯 쳐다봤다. '아, 그 아이돌.' 신타로는 얼굴에 경련이 일어나는 것을 느끼며, 최대한 '활기차게' 웃어 보였다. 괜찮아, 난 'ZERO-ONE'의 리더니까. 이 정도 기세에 눌리면 안 돼.

 

그가 명패가 놓인 제 자리에 어색하게 엉덩이를 붙이고 생수병 뚜껑만 만지작거리던 그때였다.

 

딸칵.

 

회의실 문이 열렸다. 방 안의 모든 소음이, 마치 거대한 진공청소기가 빨아들인 듯, 순식간에 사라졌다.

 

엘리후 오르피어스였다.

 

그는 검은색 터틀넥에 무채색 코트를 걸친, 지극히 평범한 차림이었다. 하지만 그의 존재감은 평범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188cm거대한 그림자가 방 안의 조명을 등지고 섰을 때, 신타로는 숨을 쉬는 법을 잊었다. 그는 소리를 내지 않았으나, 그의 존재감은 방 안의 모든 공기를 무겁게 짓눌렀다.

 

"...엘리후 오르피어스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낮고, 울림이 좋은, 그러나 어떤 감정도 실리지 않은 목소리. 그는 가볍게 목례를 하고 제 자리—신타로의 정면, 맞은편 자리—로 향했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서류가 스치는 소리, 누군가 침을 삼키는 소리만이 유일한 소음이었다.

 

신타로는 얼어붙었다. 스크린 속에서만 보던, CG보다 더 비현실적인 존재가 제 눈앞에 있었다. 흉터가 옅게 남은 무서운 인상. 날카롭게 뻗은 콧날. 그리고 그를 마주한 순간, 심장이 멎을 것 같았던 그 푸른 눈동자. 그 눈이, 스쳐 지나가듯 신타로를 향했다.

 

"......!"

 

신타로는 용수철처럼 튕겨 일어나 다시 한번 90도로 인사했다. "아카바네 신타로입니다! 저, 정말 팬, 아니, 잘 부탁드립니다!!"

 

목소리가 염소처럼 떨려 나왔다. 엘리후는 그 요란한 인사에 잠시 시선을 멈추었다. 그리고는... 아주 희미하게, 목례로 답했다. 그뿐이었다. 그는 자리에 앉아, 마치 처음부터 그곳에 있었던 조각상처럼, 묵묵히 대본을 펼쳤다.

 

신타로는 불타는 얼굴로 자리에 다시 앉았다. 망했다. 완전 쫄았잖아, 나.

 

"자, 그럼. 슬슬 시작해볼까요."

 

감독의 말과 함께, 방 안의 공기가 바뀌었다. 사담은 사라지고, 종이가 넘어가는 소리만이 공간을 채웠다. 리딩은 초반부, 다른 조연들의 장면부터 차분하게 진행되었다. 신타로는 제 차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손바닥에 땀이 흥건했다.

 

그리고 마침내. 감독이 나지막이 말했다. "12페이지, 씬 5. 키리시마와 카이토, 첫 대면입니다."

 

신타로의 심장이 발밑으로 떨어졌다. 극 중, 시끄러운 형사과 사무실에 신입 '하야미 카이토'가 패기 넘치게 등장하는 장면. 그리고 파트너로 배정된 '키리시마 레이'에게 인사를 건네는 장면이었다.

 

지문이 읽히고, 신타로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연습한 대로, 활기차고! 당돌하게!

 

"오늘부터 선배님의 파트너로 배정받은, 하야미 카이토입니다! 잘 부-"

 

"......꺼져."

 

신타로의 대사가 끝나기도 전이었다. 아니, 그건 대사가 아니었다. 방금 전까지 조용히 대본을 응시하던 엘리후의 목소리였다.

 

신타로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마주했다.

 

그곳에는 더 이상 '엘리후 오르피어스'가 없었다. 방금 전, 자신에게 희미하게 목례를 하던 그 예의 바른 배우는 존재하지 않았다.

 

대본에서 눈을 뗀 그의 푸른 눈동자. 그 안에는 경멸, 지독한 피로감, 그리고 인간을 향한 불신이 서려 있었다. 목소리는 낮고 갈라졌으며, 모든 의욕을 상실한 남자의 공허한 살기가 담겨 있었다.

 

"......꺼져. 내 눈앞에서."

 

신타로는 숨이 멎었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불타버렸다. 그건 연기가 아니었다. 엘리후는 앉은 채로, 목소리 하나만으로 '키리시마 레이'이라는 인물의 절망적인 과거 전부를 신타로의 면전에 내던졌다.

 

다음 대사가 뭐였더라. '하야미 카이토'라면, 여기서 지지 않고 "그렇게는 안 되죠, 선배님." 하고 받아쳐야 했다. 하지만 신타로의 입술은 경련하듯 파르르 떨리기만 할 뿐, 어떤 소리도 만들어내지 못했다.

 

정적이 흘렀다. 회의실의 모든 시선이, 얼어붙은 신타로에게로 향했다. 작가의 미간이 좁혀졌다.

 

"...아." 신타로는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공포였다. 포식자의 진짜 모습을 마주한, 한낱 인간의 원초적인 공포.

 

그때였다. 방 안의 살기를 흩뿌리던 '키리시마 레이'이, 스위치를 끄듯 사라졌다.

 

"...죄송합니다."

 

엘리후였다. 그가 조용히 고개를 숙이며 감독을 향해 말했다. 

 

"제가... 첫 대사부터 너무 감정을 실었나 봅니다. 아카바네 군이 놀란 것 같군요."

 

정적이 깨졌다. 감독이 헛기침을 했다. 

 

"아, 아뇨! 엘리후 씨, 연기야 뭐... 엄청나네요. 키리시마 그 자체라..."

 

신타로는 멍하니 엘리후를 바라보았다. 방금... 뭐라고? 자신의 실수를... 감싸준 건가? 아니, 그보다... 저 괴물 같은 집중력. 순식간에 '키리시마'가 되었다가, 1초 만에 완벽하게 '엘리후'로 돌아왔다.

 

수치심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자신은 고작 대사 한 줄에 압도당해 얼어붙었는데, 저 사람은 이 모든 것을 통제하고, 심지어 자신을 배려했다.

 

"아, 아닙니다! 제가! 제가 긴장해서...!" 

 

신타로가 다급하게 외쳤다. 얼굴이 터질 것처럼 뜨거웠다.

 

엘리후는 그저, 아까와 같은 무표정한 눈으로 신타로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 눈은 말하고 있었다.

 

'이 정도인가. 네가 나의 파트너라고?'

 

"......죄송합니다! 다시... 다시 하겠습니다!"

 

신타로는 대본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손톱이 종이를 파일 듯 파고들었다. 부끄러웠다. 멋있게 보이고 싶었는데, 첫인상은 대선배의 연기에 압도당해 얼어붙은 신인 아이돌이 되어버렸다.

 

 

"다시 하겠습니다!"

 

그는 감독의 큐 사인도 없이 대뜸 소리쳤다. 

 

"오늘부터 선배님의 파트너로 배정받은, 하야미 카이토입니다!"

 

아까보다 더 크고, 절박한 목소리였다. 엘리후의 눈썹이 아주 미세하게, 흥미롭다는 듯 움직였다. 그는 다시, 숨을 들이마셨다.

 

순식간에, 회의실은 다시 살얼음판 같은 경찰서 사무실로 변했다. '키리시마 레이'가, 돌아왔다.

 

"...꺼져. 내 눈앞에서."

 

심장이 다시 한번 얼어붙을 것 같았지만, 신타로는 이번엔 눈을 피하지 않았다.

 

"그렇게는 안 되죠, 선배님." 연습했던 것보다 훨씬 더 큰 소리가 튀어나왔다.

 

"...뭐?" '키리시마'의 미간이 좁혀졌다.

 

"제가! 오늘부터 선배님의 파트너니까요. 잘 부탁드립니다!"

 

신타로는 대본을 거의 외우다시피 하며, 엘리후의 푸른 눈동자를 똑바로 쏘아붙였다. 긴장으로 온몸이 덜덜 떨렸지만, 여기서 밀리면 끝장이라는 본능이 그를 지배했다.

 

정적이 흘렀다. '키리시마'는, 아니, 엘리후는 대본에 없는 침묵으로 신타로를 압박했다. 신타로는 침을 꿀꺽 삼켰다.

 

이윽고, 엘리후가 피식, 하고 대본에도 없는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는 다음 대사를 이었다.

 

"마음대로 해라. 어차피, 일주일 안에 울면서 도망갈 테니."

 

그 순간, 신타로는 깨달았다. 이건... 오디션과는 비교도 안 되는, 진짜 전쟁의 시작이라는 것을.

 

첫 대본 리딩의 충격파는 생각보다 오래갔다.

 

아카바네 신타로는 그날 이후, 독이 오른 짐승처럼 대본에 매달렸다. 그는 제멋대로이고 충동적이었지만, 한 번 '멋있어지고 싶다'고 마음먹은 대상 앞에서 추태를 보인 것은 참을 수 없는 굴욕이었다.

 

'다음엔 절대 안 밀릴 거야.'

 

그의 투지는 활활 불타올랐지만, 그것은 '하야미 카이토'의 자신감이라기보다, '아카바네 신타로'의 오기에 가까웠다.

 

그리고 마침내, 첫 촬영 날이 다가왔다.

 

<블러드하운드 버디>의 첫 촬영은, 도쿄 외곽의 낡은 경찰서 세트장에서 진행되었다. 신타로가 분장실에서 붉은 머리를 '하야미 카이토'의 차분한 흑갈색으로 덮고 있을 때, 복도 저편에서 스태프들의 공기가 변하는 것이 느껴졌다.

 

엘리후 오르피어스였다.

 

그는 이미 '키리시마 레이'의 낡은 가죽 점퍼를 걸친 채였다. 분장도 거의 하지 않았지만, 그저 그 옷을 입는 것만으로도 그는 완벽하게 '과거에 갇힌 형사'의 아우라를 풍겼다. 그는 신타로를 포함한 모든 스태프에게 조용히 목례하고는, 세트장 구석의 제자리로 가 말없이 감정을 잡기 시작했다.

 

그는 그곳에 '존재'했지만,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처럼 보였다. 누구도 감히 그에게 말을 걸지 못하는, 얼음으로 만든 거대한 벽.

 

"자, 첫 씬 갑니다! 씬 7, 카이토, 키리시마에게 도발!"

 

오늘의 하이라이트. 대본 리딩 때 신타로를 얼어붙게 했던 그 첫 대면 씬은 아니었지만,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장면이었다. 극 중, '키리시마'가 멋대로 단독 수사를 하러 나서고, '카이토'가 그를 복도에서 막아서며 도발하는 씬. '카이토'가 '키리시마'를 벽으로 거칠게 밀어붙여야 하는, 소위 '벽쿵' 장면이었다.

 

신타로는 심호흡을 했다. 괜찮아, 연습했어. '하야미 카이토'는 천재고, 당돌해. 난 할 수 있어.

 

"레디... 액션!"

 

엘리후가 먼저 복도를 걸어 나왔다. 지독한 피로감에 절어,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키리시마'의 걸음걸이. 신타로가 그 앞을 막아섰다.

 

"선배님, 멋대로 굴지 마시죠." 

 

"...비켜." 

 

"이 사건, 이제 제 담당이기도 합니다. 혼자 공 세울 생각 마시고-"

 

"......비키라고 했다."

 

순간, 엘리후의 푸른 눈동자가 신타로를 꿰뚫었다. 대본 리딩 때와 같은, 그 공허한 살기. 신타로의 등골이 반사적으로 굳었다. 하지만 그는 이를 악물었다. 밀리면 안 돼!

 

그는 대본대로, 엘리후의 어깨를 밀어 벽으로 붙이려 했다.

 

...어?

 

신타로의 손이 엘리후의 단단한 몸에 닿았다. 188의 거구는 말 그대로 '벽'이었다. 엘리후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신타로의 뇌가 하얗게 변했다. '카이토'라면 여기서 그를 제압해야 하는데, '신타로'의 몸은 "이 물체를 미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당황한 신타로가 어깨에 힘을 더 주자, 그 모습은 '도발'이 아니라 '필사적인 매달리기'처럼 보였다. 엘리후는, 아니, '키리시마'는 그런 신타로를 무기질적으로 내려다보았다.

 

"......컷!"

 

감독의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울렸다. 

 

"아카바네 군! 뭐 해? '카이토'는 '키리시마'를 압도해야지! 지금 그건... 그냥 아이가 부모한테 매달리는 것 같잖아."

 

신타로의 얼굴이 폭발하듯 붉어졌다.

 

"죄, 죄송합니다! 다시 하겠습니다!"

 

"액션!"

 

이번에는 아예 작정하고 달려들었다. 에라, 모르겠다! 그는 온몸을 던져 엘리후를 밀쳤다.

 

쿵.

 

소리는 났지만, 엘리후는 여전히 벽처럼 서 있었다. 오히려 신타로 자신이 그 반동으로 뒤로 튕겨 나갈 뻔했다. 그 모습은 '압도'가 아니라, 유치한 '몸싸움'이었다.

 

"컷!! 컷!!"

 

감독의 고함 소리가 세트장을 울렸다. 

 

"아카바네 군! 연기는 힘으로 하는 게 아니야! '하야미 카이토'는 천재라고! 저돌적이지만, 저렇게 무식하게 덤비는 캐릭터가 아니잖아!"

 

"......죄송합니다..."

 

"하아... 10분 휴식."

 

조명이 꺼지고, 세트장의 공기가 차갑게 식었다. 스태프들은 애써 신타로의 눈을 피하며 물을 마시거나 휴대폰을 만졌다. 모든 침묵이 '너 때문에'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신타로는 도망치듯 세트장 구석으로 가 주저앉았다. 미칠 것 같았다. 머리로는 알겠다. '카이토'는 힘이 아니라 기세로, '키리시마'의 허를 찌르며 그를 심리적으로 몰아붙여야 한다.

 

하지만 엘리후 오르피어스라는 '실물'이 눈앞에 서면, 모든 것이 리셋되었다. 저 압도적인 피지컬. 저 얼음 같은 눈동자. 저 존재감 앞에서 그 위에 서는 연기를 하라는 건, 신인 아이돌에게는 불가능한 미션이었다.

 

'어떡하지... 나... 진짜 망했구나.' 멋있게 보이기는커녕, 민폐만 끼치고 있어.'

 

그가 붉어진 눈시울을 감추기 위해 고개를 푹 숙이고 있을 때, 그림자가 졌다.

 

"...아카바네 군."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엘리후였다. 그가 조용히 신타로의 옆에 서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키리시마'의 살기는 사라진, 평소의 무표정한 '엘리후'였다. 신타로는 벌떡 일어나 90도로 허리를 숙였다.

 

"죄,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고개 들어." 

 

엘리후는 그의 사과를 받는 대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힘으로 나를 밀려고 하니까, 네가 더 긴장하는 거다."

 

"...네?"

 

"너는 '하야미 카이토'지, 역도 선수가 아니야. '키리시마'를 봐." 

 

엘리후는 조용히, 하지만 정확하게 핵심을 짚었다.

 

"'키리시마'는 지금 지쳐있어.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그는 방어적이지만... 불안정하지." 

 

"......" 

 

"너는 그 불안정한 중심을 무너뜨리면 돼. 힘이 아니라, 타이밍으로."

 

엘리후는 신타로에게 한 걸음 다가왔다. 신타로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내가 이쪽으로 걸어올 때, 내 무게 중심은 이미 앞으로 쏠려있다." 

 

엘리후는 마치 슬로우 모션처럼 자신의 움직임을 재현했다.

 

 "그때, 네가 이쪽 어깨—" 

 

그가 신타로의 어깨를 짚었다. 차가운 손가락. 

 

"—가 아니라, 이쪽 반대편 골반을." 

 

그의 커다란 손이 신타로의 허리 부근을, 닿을 듯 말 듯 가리켰다.

 

"중심을 무너뜨려. 그럼 나는 네 힘이 아니라, 내 무게에 스스로 밀려날 거다."

 

그것은... 연기 지도가 아니었다. 그것은 거의, 스턴트 합을 맞추는 것에 가까운, 지극히 실용적이고 기술적인 조언이었다.

 

신타로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화가 난 게 아니었다. 자신을 질책하러 온 게 아니었다. 그저... 이 장면을 '성공'시키기 위해, 가장 효율적인 방법을 알려주러 온 것이었다.

 

"넌 '카이토'다. '키리시마'를 두려워하는 게 아냐. ...안타까워하는 거지. 저렇게 망가진 선배를, 이대로 둘 수 없다고 생각하는 거다."

 

그의 무뚝뚝한 목소리가, 이상하게도 심장을 울렸다. 이 사람은 신타로의 꿈 속에만 존재하는 우상이 아니었다. 자신의 파트너를 위해, 기꺼이 자신의 '공략법'을 알려주는, 상냥하고 프로페셔널한 선배였다.

 

"...해봐." 엘리후가 말했다. 신타로는 홀린 듯 손을 뻗어, 엘리후가 알려준 그의 골반 부근을 짚었다. 

 

"그리고, 내 눈을 봐. 피하지 말고."

 

"...네."

 

"10분 지났습니다! 촬영 재개할게요!"

 

조명이 다시 켜졌다. 신타로는 심호흡을 했다. 아까와는 다른 떨림이었다. 공포가 아니라, 알 수 없는 흥분과 감사함.

 

"레디... 액션!"

 

엘리후가 걸어왔다. 지친 '키리시마'의 얼굴. 신타로가 그를 막아섰다.

 

"...비키라고 했다."

 

다시 한 번 엘리후의 눈이 살기로 번뜩였다. 하지만 신타로는 이제 그 눈을 피하지 않았다.

 

엘리후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이 사람, 지금 무너지기 직전이야.'

 

신타로—아니, '하야미 카이토'—는, 그가 알려준 타이밍에, 그가 알려준 지점을 정확하게 밀었다. 힘을 거의 주지 않았다. 그저, 그의 중심을 틀었을 뿐이다.

 

쿵!

 

188cm의 거구가, 맥없이 벽에 부딪혔다. 엘리후의 눈이, 대본에 없던 

동요로 미세하게 흔들렸다.

 

성공했다.

 

신타로는 그 흔들리는 푸른 눈동자를 정면으로 마주했다. 그리고, '하야미 카이토'로서, 그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연습했던 그 어떤 순간보다도 차갑고, 도발적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선배님이야말로, 제 앞에서 꺼져줄래요? ...이젠, 내 구역이니까."

 

"... ... ...컷!! 오케이!! 완벽해! 신타로 군, 방금 그거야!"

 

감독의 흥분한 목소리가 세트장을 울렸다. 스태프들 사이에서도 안도의 한숨과 작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신타로는 그제야 숨을 몰아쉬었다. 아드레날린이 온몸을 태우는 기분이었다.

 

그는 엘리후를 바라보았다. 엘리후는 이미 '키리시마'에서 빠져나와, 헝클어진 옷매무새를 다듬고 있었다.

 

"......"

 

신타로는 "감사합니다!"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엘리후는 그런 신타로를 잠시 바라보더니, 그저 그를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아무도 듣지 못할 목소리로, 단 한마디를 중얼거렸다.

 

"수고했어."

 

그 낮은 목소리. 그 무심한 칭찬.

 

신타로는 제 귀가 터질 것처럼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었다. 존경과는 다른, 훨씬 더 뜨겁고 질척한 무언가가, 마음속에서 싹트기 시작했다.

 

-수고했어.

 

그 한마디는 바이러스처럼 신타로의 귓가에 남았다. 촬영장을 떠나 밴을 타고 숙소로 돌아오는 내내, 심지어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는 동안에도, 그 무심하게 낮았던 목소리는 1초도 그를 떠나지 않았다.

 

그날 이후, 촬영은 기묘한 안정감을 찾았다. 물론 엘리후 오르피어스는 여전히 '벽'이었다. 그는 촬영이 시작되면 완벽한 '키리시마 레이'이 되었고, 컷 소리가 나면 누구와도 불필요한 대화를 나누지 않는 '엘리후'로 돌아왔다.

 

하지만 신타로는 더 이상 그 벽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제멋대로인 성격답게, 그 벽을 '공략'하는 데 재미를 붙이기 시작했다. 엘리후가 '키리시마'로서 자신에게 살기를 내뿜으면, 신타로는 '카이토'가 되어 그 살기를 정면으로 받아치며 웃었다. 엘리후가 무거운 감정에 짓눌려 있으면, 컷 소리가 나자마자 달려가 "방금 연기 완전 멋있었어요! 저 진짜 반할 뻔 했다구요." 라며 특유의 바보 같은 감탄사를 연발했다.

 

그럴 때마다 엘리후는, 대답 대신 아주 미세하게, 정말 눈치채기 힘들 정도로 희미한 미소를 짓곤 했다.

 

신타로는 그 미묘한 반응을 캐치하는 것이, 마치 숨겨진 이스터 에그를 찾는 게임처럼 느껴졌다. 칭찬에 약한 것은 오히려 자기 자신이었으면서, 그는 어느새 엘리후를 칭찬하고 그의 반응을 살피는 것에 매진하고 있었다.

 

시간은 속절없이 흘렀다. 드라마는 중반부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그리고, 모든 감정이 폭발해야 하는 그날이 왔다.

 

"자, 오늘 정말 중요합니다. 씬 42, 창고 씬. '키리시마'의 패닉과 '카이토'의 각성."

 

감독의 목소리에는 평소보다 더한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극 중, '키리시마'가 과거 파트너를 잃었던 순간과 똑같은 트랩에 갇혀 패닉에 빠지는 장면. 그리고 '카이토'가 그를 발견하고, 이성을 잃은 그를 억누르며 진정시키는, 두 사람의 관계가 변하는 가장 격렬한 감정 씬이었다.

 

먼지가 자욱한 좁은 창고 세트. 스태프들은 숨을 죽였다. "레디... 액션!"

 

엘리후는 구석에 웅크리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저 거친 숨소리만 들렸다. 그러던 그의 어깨가, 연기가 아닌 '진짜' 경련처럼 떨리기 시작했다.

 

"...오지 마." 

 

"...저리 가...!"

 

그는 '키리시마'가 되어, 존재하지 않는 과거의 잔상과 싸우고 있었다. 신타로가 '카이토'로서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선배님, 저예요. 카이토!"

 

"!! 오지 말라고 했잖아!!"

 

순간, 엘리후가 고개를 들었다. 신타로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그것은... 연기가 아니었다. 그의 푸른 눈동자는 공포와 절망으로 완전히 풀려 있었다. 그가 마치 길 잃은 아이처럼 벌벌 떨며 눈물을 쏟아내고 있었다. 그는 신타로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는 완벽하게 '키리시마 레이'의 트라우마 속에 갇혀있었다.

 

"...선배님."

 

신타로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저렇게 강하고, 완벽하고, 거대했던 사람이... 저렇게까지 망가질 수 있다니. '안타까워하라'는 엘리후의 조언이 떠올랐다. 아니, 이건 안타까운 수준이 아니었다.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다.

 

'키리시마'가 비명을 지르며 창고를 뛰쳐나가려 했다. 그 순간, 신타로의 몸이 먼저 반응했다. 이성을 잃었다. 이것은 '카이토'의 보호 욕구인가, '신타로'의 사적인 감정인가. 구분할 수 없었다.

 

그는 대본보다 훨씬 격렬하게 엘리후에게 달려들었다. 그 거대한 몸을 뒤에서 끌어안아 넘어뜨리고, 바닥에 눕힌 그의 위에 올라탔다. 도망치려 발버둥 치는 거구의 양 손목을, 그는 제 온 체중을 실어 결박했다.

 

"!!"

 

 엘리후가, 아니, '키리시마'가 짐승처럼 저항했다. 그 힘은 상상을 초월했다. 하지만 신타로는 놓지 않았다. 그는 거의 울부짖듯, 엘리후의 귓가에 대사를 외쳤다.

 

"정신 차려요, 레이 씨! 과거가 아니야! 지금이야!" 

 

"......!" 

 

"내가 있잖아! 내가... 당신 옆에 있잖아!!"

 

신타로의 눈에서도 눈물이 쏟아졌다. 그것은 연기인가, 진심인가. 엘리후의 저항이 서서히 멎어갔다. 공포로 풀려 있던 그의 눈동자에, 아주 천천히... 초점이 돌아왔다. 그는 제 위에 올라타 울고 있는 신타로를, '카이토'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순간, 신타로는 충동적으로 엘리후를, '키리시마'를 꼭 끌어안아 버렸다. 

"...카이...토...?"

 

"... ... ...컷!!!"

 

감독의 목소리가, 마치 먼 세상의 소리처럼 들렸다. 하지만 신타로는 움직일 수 없었다. 아드레날린이 잦아들자, 늦게나마 다른 감각이 깨어났다.

 

엘리후의 거친 숨결이 제 뺨에 닿고 있었다. 눈물로 젖은 그의 속눈썹이 처연하게 떨렸다. 자신이 결박한 그의 손목은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그리고... 그 모든 감각의 폭발 끝에 충동적으로 저지른 짓을 뒤늦게 자각하고 말았다.

 

신타로의 뇌가 정지했다....망했다. 대본에 없던 짓을 해버렸어.

 

스태프들이 감탄하며 다가오려는 찰나였다. 아직 바닥에 누워있던 엘리후가, 붉어진 눈으로 신타로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그는 이 상황을 즉각 파악했다.

 

"...카이토."

 

엘리후가 낮고, 아직 격정에 잠긴 목소리로 신타로를 불렀다. "연기... 좋았어."

 

그리고 다음 순간, 신타로의 귀에만 들리도록 속삭였다.

 

"그, ...닿고있는데. ......이제 일어나지."

 

엘리후는 마치 아직 감정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것처럼 거친 숨을 골랐다. 스태프들은 두 배우의 메소드 연기에 감히 다가오지 못했다. 잠시 후, 엘리후는 자연스럽게 신타로의 몸을 밀어내며 자신이 먼저 일어났다.

 

동시에, 그는 옆에 구겨져 있던 '키리시마'의 점퍼를 집어, 아직 바닥에 멍하니 앉아있는 신타로의 어깨에 덮어주었다.

 

"...많이 추웠지." 

 

마이크에 들어가지 않게, 아주 작은 목소리였다. 

 

"땀 식으면 감기 걸린다."

 

스태프들은 그저 '역시 엘리후 씨, 파트너까지 챙기네'라며 감탄할 뿐, 아무도 진실을 몰랐다. 신타로는 그 점퍼 밑에서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엘리후의 체향이 희미하게 배어있는 점퍼 속에서, 그의 얼굴은 귀까지 새빨갛게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날 밤. 신타로는 숙소 침대에 대자로 뻗어있었다.

 

"......미쳤지, 진짜..."

 

샤워를 몇 번이나 했지만, 아까의 감각이 사라지지 않았다. 제 밑에서 울던 엘리후의 얼굴. 그의 뜨거운 손목.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눈치채고도, 자신을 배려해 준 엘리후의 마지막 속삭임.

 

"...땀 식으면 감기 걸린다."

 

신타로는 베개에 얼굴을 묻고 발을 굴렀다. 부끄러움에 몸이 배배 꼬였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한 부끄러움이 아니었다.

 

그의 무심한 배려가, 그 어떤 격렬한 스킨십보다도 야하게 느껴졌다. 그의 프로페셔널함이, 그 어떤 다정한 말보다도 설렜다.

 

신타로는 문득, 자신이 더 이상 엘리후를 우상이나 '넘어야 할 산'으로 보고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벽에 붙은 엘리후 오르피어스의 데뷔작, <REWIND> 의 포스터. 예전에는 그저 '멋있다'고만 생각했던 포스터 속 엘리후의 얼굴이, 오늘따라 다르게 보였다. 자신이 억눌렀던 그의 얼굴과 겹쳐졌다.

 

 

 

"...아."

 

신타로는 제 심장이, 아까 촬영 때와는 전혀 다른 의미로, 미친 듯이 뛰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건 '카이토'의 감정이 아니었다.

 

이건... 명백히, '아카바네 신타로'의 것이었다.

 

 

그날 밤, 아카바네 신타로는 한숨도 자지 못했다.

 

엘리후의 체향이 희미하게 배어있던 그 점퍼는, 그의 손에 돌아갔지만 그 감촉과 무게는 신타로의 온몸에 잔상처럼 남았다. 창고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엘리후의 무너짐, 자신의 폭주, 그리고 그 경멸스러울 정도로 명백했던 생리적인 반응. 마지막으로, 모든 것을 덮어준 그 무심한 배려까지.

 

모든 것이 엉망진창으로 뒤섞여, 스물한 살의 청년이 감당하기엔 너무나도 거대했다. 그는 밤새 침대에서 발길질을 하다가, 새벽녘이 되어서야 겨우 지쳐 잠들었다.

 

다음 날, 촬영장으로 향하는 밴 안에서 신타로는 거울 속 제 얼굴을 차마 마주할 수 없었다. ‘바보, 멍청이, 이제 무슨 낯으로 엘리후 씨 얼굴을 봐.' 이 부끄러움을 어떻게든 해소하고 싶었지만 방법이 없었다. 차라리 "어제 죄송했습니다!"라고 소리치고 도망가 버렸어야 했나. 아니, 그건 더 이상하다.

 

"......최악이네."

 

세트장에 도착했을 때, 엘리후는 이미 와 있었다. 어제 그렇게 처절하게 무너졌던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그는 평소와 똑같았다. 조용히 스태프들에게 목례를 하고, 구석의 제 의자에 앉아 대본을 읽고 있었다. 어떠한 동요도, 어색함도 느껴지지 않는... 능숙함.

 

그 모습이 신타로를 더욱 부끄럽게 했다.

 

'나만... 나만 이런 거야?'

 

신타로는 삐걱대는 로봇처럼 그에게 다가갔다. 

 

"아, 안녕하십니까...!" 

 

목소리가 또 뒤집어졌다.

 

엘리후는 대본에서 눈을 떼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 무감정한 푸른 눈동자. 신타로는 어제 그 창고에서, 이 눈동자가 눈물로 젖어있었다는 사실이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좋은 아침." 

 

엘리후가 평소와 같은 톤으로 답했다.

 

그뿐이었다. 어제 일에 대한 그 어떤 언급도, 뉘앙스도 없었다. 그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아니, 정말로 그에게는 '아무 일'도 아니었다는 듯이 행동했다.

 

그 태연함이 신타로에게는 안도인 동시에 절망이었다. 그는 자신을 배려해 이 일을 묻어주는 것이었지만, 한편으로는 그 격렬했던 감정의 교류가 오직 신타로 자신만의 착각이었음을 증명하는 것 같았다.

 

"자, 오늘 촬영은 5화 분량입니다! '카이토'가 '키리시마'의 집에 쳐들어가는 씬!"

 

하필이면, 오늘 촬영은 '일상 씬'이었다. '카이토'가 폐인처럼 지내는 '키리시마'의 집에 멋대로 쳐들어가, 그를 챙겨주겠다며 서툰 솜씨로 아침 식사를 만드는 장면. 격렬한 감정 씬보다, 이런 시시껄렁한 '관계의 진전' 씬이 지금의 신타로에게는 백 배는 더 고역이었다.

 

"레디... 액션!"

 

"선배님! 밥은 먹고 다녀야죠!" 신타로는 어색함을 감추기 위해, 평소보다 세 배는 더 활기차게 '카이토'를 연기했다.

 

"......나가." 

 

엘리후는 '키리시마'가 되어 소파에 널브러져 있었다.

 

"싫은데요? 저 오늘부터 여기서 선배님 감시할 겁니다."

 

신타로는 일부러 더 요란하게 냉장고를 뒤지고 프라이팬을 꺼냈다. 하지만 그의 손끝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망할, 저 사람 지금 나 쳐다보고 있어. 엘리후의 시선이, '키리시마'의 무관심한 시선이, 소파에서부터 자신의 등에 와 닿는 것이 느껴졌다. 어제, 자신이 그를 위에서 내려다보았던 그 기억이 오버랩되었다.

 

타닥! "아야!!" 계란을 깨던 신타로의 손등으로 기름이 튀었다.

 

"...컷!" 

 

감독이 한숨을 쉬었다.

 

 "신타로 군, 너무 오버하지 마. '카이토'는 당돌한 거지, 산만한 게 아니야. 그리고 기름... 괜찮아?"

 

"아, 네! 괜찮습니다! 죄송합니다!" 

 

신타로는 붉어진 손등을 뒤로 감췄다. 또 민폐를 끼쳤다. 그때, 소파에 누워있던 엘리후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는 스태프에게 다가가 구급상자를 받아왔다. 그리고는, 쭈그려 앉아 자책하는 신타로의 앞에 섰다.

 

"...손." 

 

"...네?" 

 

"손 달라고 했다."

 

신타로가 망설이며 손을 내밀자, 엘리후는 그 붉어진 손등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리고는 익숙한 솜씨로 연고를 펴 바르고 밴드를 붙여주었다. 그의 차가운 손가락이, 자신의 손등을 스칠 때마다 신타로는 숨이 멎는 것 같았다.

 

"......" 

 

"......"

 

정적이 흘렀다. 엘리후는 그저 묵묵히 치료만 할 뿐이었다.

 

"저기... 어제는..." 

 

신타로가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감사, 했습니다. 그리고... 죄송... "

 

"아카바네 군." 

 

엘리후가 그의 말을 잘랐다.

 

"긴장 풀고." 

 

그는 밴드를 다 붙이고는, 신타로의 어깨를 가볍게 툭 쳤다.

 

"이건... 아침밥을 해주는 장면이야. 전쟁이 아니라."

 

그 무뚝뚝한 격려. 신타로는 어깨에 닿았던 그의 손의 감촉 때문에, 또다시 귀까지 새빨개졌다.

 

그날 밤. 드디어 <블러드하운드 버디>의 첫 화가 방영되었다.